그림자 공동체
박솔뫼의 부산, 산책 그리고 그림자들
1. 어딘가의 부산에서 우리는
일전에 나는 어떤 글1에서 박솔뫼가 광주에 대해 쓴 소설들을 모아 읽은 적이 있고 그가 계속해서 광주에 대해 써 내려갈 것이라고, 왜냐하면 앞으로 할 수 있는 말이 더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생각했는데 그 사이 그의 인물들의 주요 무대는 부산으로 옮겨간 것 같다. 부산은 물론 박솔뫼의 소설 속에서 낯선 공간이 아니고 「부산에 가면 만나게 될 거야」에서부터 올해 출간된 『미래 산책 연습』까지 꾸준히, 어쩌면 너무 많다 싶을 정도로 등장하는 장소이다. 부산은 물론 부산역이 있고 부산 타워가 보이고 또 걷다 보면 바다가 나오는 그 도시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당연하게도 각각의 소설이 동일한 부산을 그려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박솔뫼의 광주에서 보려고 했던 것은 80년 5월의 ‘광주’와 현재의 우리가 살아가는 광주의 관계, 그 둘 사이에 놓인 인물들의 흔들림(“그럼 무얼 부르지?”) 같은 것이었는데 기실 광주에서 그들은 모두 크든 작든 ‘광주’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고 여겨진다. 「그럼 무얼 부르지」의 “내 앞에는 장막이 있고 나는 장막을 걷을 수 없”다는 문장에서 ‘장막’이란 결국 그 의식 자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박솔뫼의 인물들에게 부산은 기본적으로 “그냥 가는 곳”임에도 부산에서 더 바빠 보이는데 그들은 끊임없이 걷고 먹으며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의식할 만한 일이 하나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것은 가상의 고리원전 사고가 발생한 근미래로부터(「어두운 밤을 향해 흔들흔들」, 「우리는 매일 오후에」, 「겨울의 눈빛」), 실제의 미문화원 방화 사건이 발생한 과거(「매일 산책 연습」, 『미래 산책 연습』)에 이르며, 출판사의 내용증명이나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등의 개인적인 일일 때도 있지만 이 모두가 부산 혹은 부산행의 결정적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래에서 다시 언급할 미문화원 방화 사건의 경우 ‘광주’와 불가분의 사건이기 때문에 박솔뫼의 부산을 광주와 유사한 방식으로 읽어낼 수도 있을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는 사정이 반대여서 오히려 부산을 통해 광주를, 나아가 ‘해만’(「해만」, 「해만의 지도」)과 ‘아직 가보지 않은’ “광주 통영 울산 제주 서귀포 전주 광양 보령”(「영화를 보다가 극장을 사버림」)……까지를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박솔뫼의 부산은 이미 ‘부산’이라는 고유명사를 초과하는 일반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이 글을 쓰기 위해 그의 전작들을 훑어보다가 『머리부터 천천히』를 다시 보고 들었던 것인데 처음 읽을 때는 거의 신경 쓰지 못했던, 부산에 관한 이야기들이 눈에 띄었다.
부산에 온 이후로 그러니까 어제오늘 우경은 병준이 헤매고 있을 법한 곳들을 걸었다. 중환자실 지도에서 적어온 동네들을 일부러 확인해가며 가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어째서인가 부산까지 오면서도 대충 휙 보고 그 이후로는 펴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병준은 우경을 걸어가게 하고 있었다. 좀더 먼 곳으로. 그 먼 곳은 전적으로 거리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 무엇인가.
(중략)
병준의 부산은 실제의 부산과 다르고 실제의 부산은 우경이 걷는 곳과 또 조금은 다를지도 모른다고 실제의 부산 같은 것을 누가 판단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고 어딘가의 모든 부산을 찾으면 거기에 병준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어딘가의 부산에서 우경은 병준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그곳의 부산에서 우리는 조금 다른 사람으로 이야기라는 것이 잘 되는 사람으로 살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창밖을 보지만 여기가 부산이라는 실감은 왠지 별로 들지 않고 어디의 부산이든 병준이 헤매고 있을지 모르는 그러니까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병준의 무의식이 헤매고 있는 부산이든 모두가 말하는 부산이든 그 밖의 부산이든 어느 어디 부산이라는 실감이 들지 않았다.
- 『머리부터 천천히』
다소 혼란스럽게 보일 수 있는 소설인 『머리부터 천천히』에서의 부산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복수의 공간으로 제시된다. 이 복수성은 하나의 부산은 혼수상태에 빠진 병준의 무의식 속에, 다른 하나는 우경의 현실 속에 펼쳐지고 있다는 현상적인 차원에 그칠 수 없는데, 그것은 이 사태의 핵심이 우경의 부산행이 다른 무엇도 아닌 병준에게서 비롯된다는 것, 즉 부산에서 병준을 만날 수 없기 때문에(만) 우경은 부산에 갈 수 있었다는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불가능성의 뒷면으로 자리하는 복수성은 우경이 부산에 내려가 걷기 시작하며 발생해 더 많은 곳을 걸을수록 선명해지며, 이로부터 명사적·존재론적이라기보다 동사적·수행적인 것임이 드러난다. 이로부터 우경이 창밖으로 내다보는 부산은 ‘실제의’ ‘모두가 말하는’ 부산과 멀어지지만, 우경이 병준의 위치가 적힌 지도를 확인하지 않는 시점에 ‘병준의 무의식이 헤매고 있는’ 부산에도 다가가지 않고, “어느 어디 부산”도 아닌 “좀더 먼 곳”으로 나아가는 자신(만)의 부산으로 확장된다.
『머리부터 천천히』에서 보이는 이러한 공간의 복수성은 흥미롭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어떤 시간의 복수성과도 연관되는데, 이 소설 속에서라면 액자식으로 삽입된 속리산 할머니나 이덕자의 이야기에서 이를 발견할 수 있다. 박솔뫼에게 이 두 복수성은 구분되지 않거나 특히 인물을 경유하여 강하게 결부된 채로 제시되며, 그들이 ‘살 수도 있었던 삶’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는 행위는 우경을 비롯한 인물들이 부산의 골목을 헤매고 다니는 모습과 겹쳐 보인다. 특기할 만한 것은 ‘살 수도 있었던 삶’, 즉 과거의 시점에서 가능했던 미래는 산책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산책과 동시적으로, 혹은 산책의 궤적 위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이덕자에게는 정말로 펼쳐져 있는 어떤 삶이 있었고 그것은 아주 어렵거나 한 것도 아니고 어떤 언덕을 홀로 걷거나 공원을 산책하다가 문득 이 길을 다른 방법으로 걷게 되는 일이 생겼을 것이라고 그것을 스스로 알게 되는 그런 일입니다. 아주 강렬한 예감이고 확실한 자각 같은 것입니다.” 즉, 박솔뫼의 인물들이 끊임없이 하고 있으며 또 하고 싶어 하는 ‘산책’은 겉보기와 달리 만보(漫步)가 아니라 보고자 하는 대상보다 앞서 무언가를 보게 되는 역설을 품고 있는 행위로 읽히며, 그렇기에 특정한 종류의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 또한 자연스럽다.
2. 바람에 스르르 넘어가는 페이지들
「매일 산책 연습」, 그리고 거기서 확장된 장편인 『미래 산책 연습』은 굳이 분류하자면 ‘정극’에 속하겠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다소간 환상적인 느낌을 받는다면 소설 전체에 걸쳐 등장하는 최명환이라는 인물 때문일 것이다. 최명환은 우선 열아홉 살부터 일을 하며 돈을 모으기 시작해 이제는 예순이 넘고 오래된 아파트를 몇 채나 가지고 있는 여성이지만 무엇보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을 바로 그때 근처에서 지켜본 인물이다. 박솔뫼의 소설 속에서 이런 인물, 그러니까 술을 잘 마시고 ‘과거’를 알고 있는 어른들은 「그럼 무얼 부르지」 - 『머리부터 천천히』 - 『인터내셔널의 밤』 등에 걸쳐 여러 차례 등장하지만 그들은 ‘안다’와 ‘모른다’만큼이나 화자와 분명한 거리감을 가지고 있다. 그들과 달리 최명환은 화자에게 선뜻 자신의 집을 빌려주고 술과 커피를 사주며 과거에 대해 덤덤하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최명환의 이야기를 듣고 난 화자는 새벽의 창가에서 혹은 목욕탕에서 82년의 최명환을 상상하고 아니 보다 구체적으로 상상 속에서 그가 되어본다.
화자와 최명환의 이러한 상호성은 서로를 특정한 역사적 지점으로 두고 생각할 때 묘한 방식으로 변환되는데, 즉 화자에게 있어 최명환은 과거(자신보다 먼저 태어났으므로)인 동시에 미래(자신보다 오래 살았으므로)가 되고, 최명환에게 있어 화자도 마찬가지이며, 이러한 이중성 위에서만 두 인물 사이로 전달될 수 있는 것―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미문화원 방화 사건의 주도자 중 한 명인 김은숙에 대해 묻는 화자에게 최명환이 ‘들을 준비’가 되었냐고 반문하는 것이나 특히 『미래 산책 연습』에서 “그[최명환]의 얼굴에 드리워진 나의 그림자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의 얼굴에 본 적 없는 감정을 보이게 하”며 두 인물이 겹쳐지는 장면은, 각자의 자리에서 ‘장막’의 존재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연대”(「9월 도쿄에서」)가 아닌 유대를 이루고 그것을 ‘걷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최명환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화자는 김은숙에 대해 ‘알게’ 되었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최초의 불가능성, 광주에서 ‘그날’ 대신 ‘떡과 죽과 국수’를 말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불능은 사라지지 않는다. 최명환의 모든 호의에도 불구하고 “그가 해주는 이야기는 한편으로는 그가 감추는 이야기일 것이고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 동시에 그것을 감추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혹은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그 불능 자체와 우리가 관계를 맺는 방식에 있으며, 나는 이것이 박솔뫼의 소설이 ‘아카이빙’과 결정적으로 결별하는 지점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김은숙이 번역한 평전 속 밥 딜런처럼, 박솔뫼의 소설 또한 그것이 가장 역사적이고 정치적일 때에도 “저항곡이 아니며 그런 식의 무엇도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저항곡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누군가를 위해서 누군가에게 전해들은 것을 쓸 뿐이다.”
소설과 속리산은 둘 다 ㅅ으로 시작하고 아버지의 소설은 속리산의 할머니 이야기이니 아버지의 소설도 ㅅ으로 시작한다. 어디에선가 많은 페이지가 넘어갔다. 나는 그것을 전부 들을 수 없었다. 조금 들을 수는 있었다. 자신의 소설이지만 자신도 모를 수 있어, 나는 아버지가 소설 속리산에 대해 ㅅ으로 시작하는 것에 대해 실은 잘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속리산도 쓰지 못하고 ㅅ으로 시작하며 끝내고 그 정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하자마자 바람에 스르르 넘어가는 페이지들이 보였다. 페이지들은 넘어가고 다시 반대 방향으로 넘어가고 그러면 알고 모르고 알고 모르고라는 말 자체가 아주 우습고 부주의한 것으로 여겨졌다. 페이지는 어딘가에서 넘어가고 다시 앞으로 되돌아가고 다시 넘어가고 있다.
- 『머리부터 천천히』
『머리부터 천천히』의 프롤로그 격인 ‘속리산 할머니’의 이야기는 아버지와 속리산 할머니와 할머니의 어머니……로부터 전해지고 그것을 ‘전부’가 아니라 ‘조금’밖에 들을 수 없는 ‘나’(의 상상 속 속리산 할머니)는 속리산에 가고 싶지 않고 속리산에 대한 소설도 쓸 수 없어 “ㅅ으로 시작하며 끝내고 그 정도”를 반복한다. 그 사이 속리산 할머니는 “바람에 스르르 넘어가는 페이지들” 속 만주에 가서 독립운동을 하거나 일본에 가서 여러 개의 술집을 열고 그 모든 삶을 살아내느라 “2백 년을 살아도 이상할 게 없”다. 속리산 할머니 이야기를 처음 들려준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어딘가에서 넘어가고 다시 앞으로 되돌아가”는 반복 속에서 속리산 할머니는 아직 살아 빨래를 하고 있으며 언제고 자신을 찾아올 ‘나’에게 이렇게 말해줄 것 같다. “어떤 시간들은 뭉쳐지고 합해지고 늘어나고 누워 있고 미래는 꼭 다음에 일어날 것이 아니고 과거는 꼭 지난 시간은 아니”라고.
나는 최명환이 『미래 산책 연습』의 화자에게 전해준 김은숙의 이야기도 본질적으로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최명환의 이야기와 별개로 김은숙에 대해 안다 모른다 말하는 것은 사실 ‘우습고 부주의한’ 것일 따름이며, 다만 그 이야기 안에서 비로소 김은숙은 현재, 즉 82년의 “그들이 손으로 만지고 반복한 미래로” 불려와 운신하고, 반대로/동시에 화자는 경직되지 않으면 증발해버리는 과거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젊은 시절의 최명환을 만날 수 있게 된다. 「매일 산책 연습」의 말미에 자리하는 ‘가상 산책’이란 결국 ‘조금 들을 수는 있’는 누군가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과거에게 다른 하나의 미래를 관계지어주는 일이며, ‘ㅅ으로 시작하는’ 소설의 역할 또한 여기서 멀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문득 이런 의문이 생긴다. 현재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대신해 혹은 인도하여 이렇듯 과거와 미래를 부지런히 오가고 연결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즉, ‘가상’ 산책을 ‘실제’로 하는, 부산에 사는 ‘가상’의 나와 나란히 누워 ‘실제’의 나를 잠으로 이끄는 주체는 누구이며 어떤 특성을 가졌을까? 이에 대해 작가는 최근 커다란 힌트를 제시한 바가 있다.
3. 어둠 속에서도 개가 있다는 것
올해 여름에 발표된 단편인 「믿음의 개는 시간을 저버리지 않으며」는 넓게 보면 동면 연작에 속하지만 ‘그림자 개’라는 존재가 등장하고, 소설을 다 읽는다고 해서 그림자 개란 무엇이구나 알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개를 그림자 개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림자 개의 존재를 저항감 없이 받아들이는 시온과 달리 태식은 그림자 개가 어디서 왔는지 상상하다가 “어딘가 먼 곳에 개가 있고 그 개가 반사되어 그림자로 나타나는 것”, “영화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박솔뫼의 소설에서 극장과 영화는 또한 아주 친숙한 소재이지만 이 지점에서는 어떤 물성 같은 것을 떠올릴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림자와 영화는 우선 원본에 해당할 것의 존재나 빛으로 이루어진다는 점 등에서 서로 닮아있지만 나는 그보다도 그 빛이 투사될, 즉 가로막힐 평면을 필요로 하며 그로부터 발생한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그림자 개의 가장 중요한 존재론적 특성이 여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 지금까지의 박솔뫼의 ‘장막’이 어떤 불가능성의 은유로서 기능해 왔다면 그림자 개는 바로 그 ‘장막’, 즉 불가능성 위에서 태어난 존재다. 나아가, 우리가 알던 그림자가 자신의 원본에 종속돼 동일한 시공간에 자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면 그림자 개는 실제 개의 여부와도 무관하게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스스로 찾아 나설 수 있는 존재다. 다시 말해, 그림자 개는 그 자체로 ‘장막’의 불모성과 절대성에 대한 박솔뫼식 반증이다.
그런 그림자 개는 실제의 개와 마찬가지로 “시간과 마음의 연결이 약해진 사람들에게 나타나 산책을 요구”하며, 다만 “익숙해졌을 때에는 이미 자신의 길로 여행을 떠나 모습을 감춘다”. ‘시간과 마음의 연결이 약해진’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조금 모호하지만 ‘시간과의 관계성’을 회복하기 위해 요구되는 ‘산책’은 이 소설을 그의 전작들에 이어 읽을 수 있도록 한다. 구체적으로, 그림자 개로 찾아온 두두와 두부와의 산책에서 돌아오며 시온은 “그저 걷기만 했던 방금 전의 순간들이 생생하게 자신 안에서 만져지고 냄새 맡을 수 있”게 되는데, 이는 우선 “시간이 품은 가능성과 매 순간의 본성을 완전히 느끼고 이해하”며 기억과 감각을 회복하는 일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동시에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사람인 우리가 그림자 개와 동일하게 그것을 해낼 수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적어도 그림자 개와 함께 산책하는 동안 우리는 “그림자로 된 목줄”을 쥐고 “개와 사람 그리고 목줄이 만들어내는 조금 귀여운 그림자”가 되어볼 수 있다.
12월 31일이 되면 어째서 나 자신과 가족들 친구들이 아니라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 믿게 되는 그림자 같은 이들을 생생하게 떠올리는 것일까. 1월 1일의 새벽 아직 덜 마른 머리를 빳빳한 침대 위에 누이며 모든 멀고 생생한 이들이 잠깐 온양에서 잡힐 듯이 가까워오는 것을 느끼며 잠이 들었다.
- 「우리의 사람들」
우리는 그것을 보았다. 그림자뿐이었지만 우리가 본 것이 바로 그것이었고 우리에게 나타나 펼쳐진 것이 바로 그림자였다.
- 「믿음의 개는 시간을 저버리지 않으며」
태식이 느꼈을 것과 같은 ‘난감함’에도 불구하고 그림자 개가 우리를 정말 산책으로 이끈다면, 산책 중에 만나게 되는 것들만큼이나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 믿게 되는 그림자 같은 이들”, 그러니까 ‘부산에 살고 있는 나’라든가 ‘북으로 건너간 이덕자’ 같은 이들과 더불어 걷고 밥을 먹고 잠을 잔다면 그들 또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를 가능케 할 지평인 ‘미래’는 어떨까? 지금의 우리가 바라는 미래를 ‘연습’해 본다면 그러한 미래 또한 이미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사쿠라이 다이조는, 80년의 ‘광주 전남 미술인 공동체’는, 그리고 박솔뫼는 거기에 단호히 예, 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입증될 수 있는 종류라거나 심지어는 그럴듯한 것도 아니며, 따라서 하나의 믿음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박솔뫼의 소설은 소설 속 인물들은 “걸으며 신앙에 대해, 훼손되고 흔들리기 쉬운 믿음에 대해” “흔들리면서도, 훼손된 부분을 문지르고 씻기면서 그것을 회복하려 애쓰며 지켜나간다.” 이것이 바로 그림자 개가 ‘믿음의 개’이기도 한 이유일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산책을 통해, 또 그림자 개를 통해 박솔뫼가 (이제는 복수성의 뒷면인) 불가능성과 맺는 새로운 관계를 볼 수 있으며, 나는 이러한 관계로 묶인 이들을 ‘그림자 공동체’라고 불러주고 싶다. 다른 글에서 보다 자세히 다뤄져야 하겠지만, 우리는 이것과 비슷한 관계를 동면자와 동면 가이드 사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믿음의 개는 시간을 저버리지 않으며」에서 그림자 개와 산책을 하다 ‘탁한 그림자의 존재’를 만나는 태식과 시온 각자의 일화를 통해 엿볼 수 있는 것처럼, 박솔뫼의 소설 속에서 동면 기간 동안 동면자의 꿈과 동면 가이드의 현실은 분명한 거리를 두고, 그러나 평행하게 펼쳐지고는 한다. 동면 가이드는 대개 동면자와 같은 공간에 머물러야 하기에 평소라면 가지 않았을 곳에 가서 겪지 않았을 일들을 겪게 되는데, 이때 그의 위상은 동면자의 그림자와 멀지 않아 그가 분명 혼자 걷고 있을지라도 둘 이상이 되어 걷는 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불가능성-복수성의 쌍을 찾아볼 수 있겠지만, 이것은 이전처럼 부정적이거나 회피적인 양상을 띠고 있지 않다. 동면에 들었던 이는 언제고 깨어나며, 동면 가이드는 그에게 필요한 약을 주고 무엇보다 동면 동안 꾸었던 꿈 이야기를 들어준다. 동면자가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그들은 천천히 산책을 하기도 하는데, 그때 그들이 또 다른 그림자 개를 만나게 되는 것은, 나아가 서로의 그림자가 되어주는 것은 또한 그림자 공동체로서 매우 자연스러운 일일 터이다.
1. 「아카이브의 여부(餘部) - 아카이브로서의 소설과 박솔뫼의 광주에 대하여」, 《대학신문》 2000호, 2020.12.09. 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8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