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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을 위한 기도

김말봉과 박솔뫼 『기도를 위하여』




나는 지금 부산의 한 카페에 앉아있다. 살면서 부산에 방문한 것은 한손에 꼽을 정도라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퍽 우연처럼 여겨지는데 지난 몇 년간 내게 부산은 박솔뫼의 소설로만 여러 차례 방문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 ‘산책 연습’들에 대해서라면 이런저런 기회로 실컷 이야기할 수 있었기에 아 이제 배부르다 정말 그만 써야겠다 생각했지만 막상 부산에 왔더니 왜인지 계속해서 말을 해볼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대전에 내리던 비가 부산에는 내리지 않고 플랫폼에서부터 느껴지는 바람의 낯선 질감 그리고 부산역을 나서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렇게 시작하는 이야기를 말이다.

『기도를 위하여』를 처음 접하고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것은 구성이다. 표지에는 두 저자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는데, 일반적으로 쓰이는 쉼표 대신 접속조사 ‘과’가 그 둘을 연결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의 저자는 ‘김말봉과 박솔뫼’. 이게 무슨 의미일까 어쩐지 두 저자가 하나의 펜을 같이 쥔 모습을 상상하게 되었는데. 책머리에 적혀있는 편집부의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을 포함하는 시리즈, ‘소설, 잇다’는 “근대 여성 작가와 현대 여성 작가의 만남을 통해 한국 문학의 근원과 현재, 그리고 미래를 바라보자는 취지에서 기획된 시리즈”이며, 출판사에서 근대 여성 작가의 작품 세 편을 먼저 선정하고 현대 여성 작가가 그중 한 편을 골라 변주하는 식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와 같은 방에 머무른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만났다’고 할 수는 없다. 한 작가가 다른 작가를 어떤 모습으로 만날 수 있는지, 또 독자로서의 우리가 그들과 어떤 도형을 이루게 될지 알기 위해서는 언제나 직접 책을 펼쳐보아야 한다.

학창 시절부터 나는 항상 이 시기의 소설들에 미묘한 거리감을 느껴왔는데, 예컨대 김말봉이 그려내는 일제강점기 조선이라는 시공간과 풍경들은 먼 옛날 같다가도 또 그가 살았던 부산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같은 이름으로 불리고 같은 길을 사람들이 걸어 다닌다고 생각하면 모르는 척하기 어려운 친근감이 발생하는 식이다. 한편으로는 김말봉의 인물들이 느끼는 절절한 감정들이 명월관이나 식도원 같은 옛 고유명사들과 더불어 적당히 바랜 채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많은 인간사가 그렇듯 지나간 소설도 지나간 대로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어떠한 의의를 부여한다는 명분으로 우리가 이들의 시간을 박탈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책은 김말봉의 소설들을 지나 훌쩍 먼저 그를 만나러 간 박솔뫼의 소설에 이른다. 나는 이 책을 그렇게 읽었다. 백 년 전의 김말봉을 읽고, 김말봉을 읽는 박솔뫼를 읽고, 이것들과 무관하거나 무관하지 않게 부산에 와 있는 나는.

박솔뫼의 소설 「기도를 위하여」는 김말봉의 「망명녀」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를 작가가 상상하는 식으로 구성돼 있지만 두 소설의 어조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박솔뫼는 김말봉과 그의 소설에 특별히 육박하려고 하기보다는 그냥 그런 일이 있었지 하고 「망명녀」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겪은 인물들을 데려와 조금 쉬게 했다가 떠나보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아마 작가 자신일 소설의 화자는 김말봉과 그리고 정지용, 윤동주가 다녔다는 교토의 도시샤 대학에 가서 그들의 시비(詩碑)를 찾아보지만 그것은 그들에 대해 무언가 더 알기 위해서라기보다 자신의 산책에 발 디딜 곳을 마련하기 위해서일 따름인 것처럼 보인다. 일본으로 이어지는 작가의 궤적과 엇갈리게, 유학을 마치고 조선에 돌아왔을 때 일본어를 모르는 척해야 했다는 김말봉의 사정까지 생각해 보면 그들의 행적에 남은 여백들은 자연스럽다. 문제는 그 여백을 마주하는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냐이다. 지금 여기의 것이 아닌 소설을 읽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그것을 따라가 보아야 할까? 그가 남긴 기록들을 조금 더 읽어보고 그가 올랐던 언덕을 한 번 더 오를 때 우리는 그와 얼마큼이라도 가까워지는 것일까?

박솔뫼의 경우, 나는 오히려 소설 뒤로 이어지는 에세이 「늘 한 번은 지금이 되니까」의 마지막 순간에 작가가 “자 이제 일어나야 할 시간이야 물을 마시고 옷을 입어야 해 나가야 해 하기로 한 것을 하자”고 생각할 때, 또 “자 이제 씻고 무엇이든 써야 해 예외는 없어 방금 생각한 것 생각한 것이라 착각한 것을 쓰자”고 생각할 때 김말봉과 비로소 만나고 있다는, 정확히는 그와 교차함으로써 하나의 평면을 완연히 이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까 하나의 ‘연습’이 끝나는 바로 그 순간에. 윤숙의 기도와 작가의 산책에 공통점이 있다면 하나, 거기에 언제나 시작과 끝이 있으며 둘, 언어에 미만해 자기 자신과만 공유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말일까? 그러나 이를 달리 말하면 하나, 그것은 영원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형식으로 둘, 지속되는 동안 자신의 대상을 변형하는 대신 보존할 수 있다. 이들은 이렇듯 자신의 최소한에서부터 세속성을 잠시 중단시키는 하나의 리추얼로 기능한다.

따라서 기도와 산책은 표절할 수 없다. 김말봉이 걸었던 부산과 박솔뫼가 걸어가는 부산이 다르듯 우리가 누군가의 궤적을 반복하더라도 결국 자신의 부산을 걷게 되고 만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이 부산들은 미래가 과거의 것을 덮어쓰는 대신 시간 앞에 나란해진다. 이 나란함은 「기도를 위하여」에서 한번 죽었지만 ‘그림자’로 돌아온 순애를 사이에 두고 누운 윤숙과 윤 사이에서도 발생하는 것인데, 이때 윤숙은 윤을 연인도 형제도 아닌 단지 “여동생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최초의 여성 장로이자 인권 운동가였던 김말봉이라는 인물도, 또 그런 김말봉이 써 내려간 소설도 이렇게 읽어볼 수 있지 않을까? 백 년 전 대중소설로서 지나간 이야기라기보다는 그때나 지금이나 부산인 부산을 걸었던 이야기로 말이다. 그런 이야기에는 “이곳에 와도 좋고 여기서 시간을 보내도 좋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다정함”이 남아 있기 마련이다.

나는 이것이 박솔뫼가 내어주는 손이라고 생각한다. 「기도를 위하여」의 첫 장면은 순애와 윤이 감옥의 창살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손을 맞대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때 통할 수 없는 것은 서로의 육신인 반면 무언가 통하는 것 또한 있다면 우리는 그 맞닿음을 둘을 위한 기도라고 불러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 기도의 본질적인 내밀성은 이 순간 모순에 처하기보다 기존하지 않던 공간을 스스로 만들어 낸다. 바로 이 자리에서 김말봉과 박솔뫼의 소설은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부산을 ‘다시’ 찾아올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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