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시보의 개 - 無蓋貨車

플라시보의 개



약제실에 감금된 것은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

태어나 가장 먼저 배웠던 것은 하루 세 번 암전된 설원의 뜻


인간들은 조금 더 구체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허기 속에서 우리가 번갈아 핥던 유리병처럼, 캡션이 달려 있다면 좋을 거야 : 털로 덮인 머리와 성기를 하나씩 가졌고 그것이 춥고 고통스러울 예정임


처음부터 겨울이 아니었으므로 누구도 양반은 못 됨


따뜻해… 따뜻해… 중얼거리다 마침내 녹아버리는 고답주의자들

비 오는 날이면 하수구에 핏덩이들이 걸려있기도 해

무섭지? 간절히 바라면 무언가 이루어진다는 것

따뜻해? 우는 법도 모르면서


오늘의 전적을 기록합니다, 펜촉과 서로의 털에 침을 묻혀가며 담뱃재처럼 늘어나는 수명으로


죽기도 전에 회고조가 되는 건 시시하다고 생각했다

알약을 삼킬 때와 기도를 할 때 한없이 근사해지는 고개의 각도


몸속에 파묻힌 관(管)마다 서늘이 도는 이유가 여전히 자신에게 있다 믿겠지

그래 그래… 마음대로 생각하자 끄덕여주는 턱 끝처럼

일필로 적힌 말들에 매달릴 줄도 안다니

정말이지 힘들이 넘친다


그러니 돌아가

스무 살 때 모르던 것들은 죽을 때까지 알 수 없다

나는 나도 오 년에 한 번만 만나고 싶다


눈을 빚고 눈을 썰며 한 생을 풀칠하던 악마들이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앓던 시간은 순도 높은 알코올처럼

쉽게 맑아서

온 산을 덮어도 밤새 반짝일 뿐, 아침은 모른다


배웠지 발톱을 죽이는 법


동그랗게 만 설원을

주인의 입 안에 조용히 펼쳐둘 뿐





상강



수도꼭지가 새기 시작해서 나는 방을 나와 바다로 갔다 파도를 구겨진 이불처럼 걷어차며 걸었다


점점 낮아지던 허밍이 바닥에 닿으면 하늘 끝에서부터 새들이 떨어져 내렸다 모래밭은

온갖 동사가 자라기 좋지, 흰 사체는 어쩐지 몽돌을 닮았다


하나를 주워 힘껏 던졌다 아무런 울음도 들리지 않았다 둘을 주워 힘껏 던졌다 아무런

울음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셋을 줍는 대신 누수와 낙수의 차이에 대해 생각했다


날아간 것들이 돌아오지 않아도 해안은 반쯤 잠긴 방이 되기에 충분했다 나는 하염없이 돌아가는 등대를 바라보았다 색이 되기 이전의


빛에서 미래를 찾는 것이 벌레들의 독법이라면 썰물에 제 몸을 터주는 것은 물고기들의 보법

아무도 없단 걸 깨닫고 입을 벌리기 시작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창법이지 새벽의 횡단은 부단하지 않으면 무단해진다 이 벽에서 저 벽까지


휘파람을 그어 그날의 일기를 정리했다

노래를 다 부르면 물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방이 나올 때까지 계속 걸었다 허밍이 없어도 새들이 떨어져 내렸다 새들이 없어도 새들이 떨어져 내렸다





갈라파고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기입되는 중이다 팔과 다리를 접어넣으며

이것은 거북의 기분이다, 이것은 방주의 기분이다 떨려오는 근육들을 묵살하고 출항을 감행하면

참조할 만한 물살이 없었다 이 비는 지면에 느린 두께를 더한다


오늘의 얼룩은 무늬라 부르는 게 어떨까? 일찌감치 핥기를 그만둔 개들의

합의가 완성되고 다시 텅 비는 골목

넝쿨을 더하고 담장을 곱할게 조립된 친구들이 애수에 시달리도록 지도를 종료할게 거기서 우리는 초식성 생물이 되어


바다를 모른 채 멸종했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매해 밭을 일구고

수확한 보리로 맥주를 빚으며


얼마큼의 시간이 흘렀는지에 대해서는 기록할 바가 없습니다 거품이 일고 거품이 잦고

우리의 유리가 조금씩 정교해지는 동안

창밖으로는 장마와 혁명이 지나갔지요


오렌지빛에서 호박빛으로


기우는 안색들 속에서

돋아난 예감을 말려 화병에 꽂아두었다 생기란 끝내 결말을 홀대한다는 것 며칠 째 이어지는 아이들의 눈싸움과 같은 페이지에 멈춰 있는 책처럼

선결해야 할 기적들이 목가적인 콧김을 뿜으며 흩어져 있다


아침마다 우유가 잔을 지우는 것을 보며 그 많은 예외를 익혔습니다

이것은 섬들의 기분이다, 이것은 파도의 기분이다

상기되어 돌아온 아이의 뾰족한 코끝을 지긋이 누르며

몸통과 몸통을 갈아 끼우던 감각을 기억하는 손을 내려다본다


탁 소리와 함께 탁자가 문맥을 빠져나가고





누아르



개라서 다행이다 나는 바리케이드를 넘고 개라서 다행이다 나는 들판을 가로지르고 발각되지 않고 개라서 다행이다 군인들은 총을 겨누지 않고 외계인들은 시혜를 베풀지 않고 개잖아 다행이군 다행이네 낄낄거리고 숨어있던 연인들은 놀라지만 뭐야 개였군 안도하고 안도 속으로 사라지고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무언가 큰일이 벌어지고 시끄러웠으므로 마음껏 짖었고 몰래 좀 물었고 불질도 해봤다 섬광과 적막 속에서 깨어나 날아가고 회전하고 추락하는 것들을 바라보며 다행이야 공중이 아니라도 나는 곧 죽는다 개는 곧 죽으니까 전투는 이어지고 시체는 쌓여가고 나는 달리고 달리다 불꽃들 사이로 피어오르면 저것은 무엇인가 저것은 개다 정말이지 개로군 웅성거려도 이것은 아름답고 저것은 아름답고 그것처럼 그것처럼 나는 개입니다 다행입니다 예컨대 개는, 무너지는 골목에게 휘말립니다 개는, 잃어버린 개를 되찾기 위해서 개는, 은밀히 그림자를 뒤쫓고 개는, 수차례 개를 찌르고 개는, 붉은 피를 입으로 쏟아내고 개는,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없었다, 개니까, 다행이다 담장을 빠져나왔을 때 모두는 서로를 끌어안은 채였고 아무런 부음도 알아듣지 않았고 이 행성의 무사와 달렸습니다 한때의 일이었으나. 개라서 다행이었다.





메르카토르



코를 훌쩍이며 너는

집으로 오는 길에 많은 것들을 보았다고 말한다 나는 인천항에서 골리앗 크레인을 처음 보았다 어땠어?

거대했어 황열병 예방주사라면 나도 맞아봤어 남국에서

이상한 눈으로 누워있는 사람을 보았는데 동행이 가르쳐주었다고

남국에서는 누워있는 사람도 동행도 다 거대하더라

길가에 개들이 정말 많았는데 개들도

개들이 문 참외도

거대하고 그늘에서도

구슬땀 쏟아지던 날 검역소 앞에서 생물답게 차례를 기다리던 기억, 갈매기도?

모르겠어 갈매기는 멀고 나라에서

나라로 날아가기도 하니까 우리가 보지 못한 것들도 보았을 것이다


*


허기와 우울이 아니더라도 극지에서 방향감각이 희미해지는 일은 매우 흔합니다 똑바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왼 다리와 오른 다리의 길이가 다르다면 머리는 원을 그리고 있습니다 손을 잡고 걷는 두 사람이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는 일은 따라서 당연합니다 지는 해와 더불어

제자리로 돌아가는

인천항의 컨테이너들은 조금씩 네모를 벗어나고 모두 펼치면 나라를 두 번 덮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개와 인간을 가리지 않고 공자와 생활도 한없이 나란하며 오대양 육대주가 될 때까지 익명의 해안들을 서로의 손금처럼 놓치지 않고 전전할 것입니다


*


갈매기가 울겠지

돌아가는 길을 잊어버린 남국의 해변에서

그리고 죽을 것이다 마카로니를 먹을 때에는*

누구라도 꼭꼭 씹어 삼키는 편이 좋다 이것도 거대한 개들이 가르쳐주었냐고, 나는 묻지 않고

백야의 햇빛으로 노랗게 익어가는

유빙들 거대한 흰자들

너는 보았지 눈이 내리면 지붕과 바닥이 나란히 구름을 바라보던 집이었다

잠에서 깨면 벽마다 슬어있던 포말을 터트리며

방파제에서 죽은 생물들을 주워와 섬으로 섬으로 펼쳐놓던 일

그 해 우리가

잡은 손을 놓지 않았으므로 방은 바다를 모를 만큼 넓어지고

골리앗에 매달린 동행들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었다


* 김수영, <孔子의 生活難>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