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핏
진행 중인 건축은 차갑고
일가의 몰락을 의미하는지 새로운 종의 선포를 예비하는지 궁금하지만 그걸로 완성일 수도 있겠지
확실한 것은 그늘의 부드러움
같은 그림을 걷어차는 데 떨어지는 것들이 매번 달라서 내 복도는 끝없이 이어진다
방에 돌아왔을 때 식탁 위에 낙조와 무엇이 놓여있어도 이상하지 말자
거꾸로 읽어도 다 말이 되는 메모를 믿고
일생을 채워 넣었던 가구들이 왕만두처럼 아름답길
그러나 침대를 대신해 누워있는 내가 바랐다
도망가는 동쪽
네가 터뜨린 분통으로 하나 더 뚫어놓은 창
지나치게 반듯하다
그런 게 아냐 구름은? 산불을 피해 필사적으로 달리는 동물을 쫓다 산불보다 먼저 꺼져버리는 화면은? 그리고 얼마만큼의 세계가 흘렀는지
세계의 등에 손을 넣어보면 안다
축축해
예정을 초과한 광량에 꺾인 목에서 새는 비밀이
네가 아껴 씹던 과일숲처럼 달고 과일숲처럼 비리다
층고가 낮을수록 밝아지는 벌레의 눈
벽돌과
나무와 유리와
피부와 주름과 온기와
마지막 창을 열자 건물은 완벽한 그늘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팔레트에 적재되지 못한 색을 지어내느라
혀를 섞고 있는 풍경과
모서리에 이르러 쏟아지려는 배를 태엽처럼 감아 돌려보낸 고향마다 어설픈 역병이 휩쓸고
기침이 살아남은 유일한 구애가 되는 악취미
싫증일 수도 있겠지 너의 메모는 장래와 더불어 더 이상 살아줄 것이 없다
농담(濃淡)에 실패한 얼굴들이 쌓여있는 개수대
떨어지는 물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
(근작)
오버핏
우산은 귀가 얇고 소모성이다 일주일치 날씨를 외며 가방을 채워넣다가 나는 그것을 알았어
일기(日氣)에도 클리셰가 있다면
믿겠니 먼 바다는 이면에 미만하고 누군가 흐리다는 말을 몰랐다
주고받은 침묵 속에서 고의적으로 누락된 획처럼
부자연스러운 능선이 골과 마루를 질질 흘리며 뻗어가고 우리는 이 행성의 작동원리를 오해하는 데 성공하지
무지개의 식사장면을 본 적 없을 거야
아이들이
분수로부터 사들인 행운의 액수를 기억하지 않듯
자발적으로 무너지는 언덕들
구름의 맹종
계단에 엎드려 계단 모양이 되어가는 사람들
우리가 길러낸 식물은 도시보다 수명이 길고 함유된 고성(高聲)도 많다
비명(碑銘)을 위해 아껴둔 기후가 천천히 혀끝을 파고드는
말하자면 다 낡은 발목의 기분
흔들거나 입김을 불어서 책상에 쾅쾅 내리치면서 부지하는 목숨의
기분 날마다 이 리터 상당의 물을 조금씩, 끈질기게
섭취하는 기분
자라 무엇이 되겠습니까?
한 주기의 세떼가 쓸고 간 공중으로부터 떨어지는 V자
믿겠니 지상에 도달하기 전에 우리는 서로의 장례에 맞춰 뿌렸던 눈물의 순(順)을 복기하지
그게 잘못된 걸까 맑음 맑음 다음엔 비
비가 아니면 긴 잠을 확신하며
몇 세기 전 동전까지 유효한지를 두고 엄지를 튕겨보던 경쾌가
가설무대를 받치는 막대의 불안과
각자의 가방에서 덜그럭거리고 있는 천체의 수효가
여기는 언제나 기우뚱거리며 처음 와보는 불투명
밀물로 제 살을 저미는 해변의 대립항
무엇이 담겨 있었는지 열 때마다 인광이 튄다
표정을 읽기엔 모자라고
날짜는 눈부시다